행운의 전령(행운의학)

무지개다리 올라가는 그날까지 행복의 문을 활짝 열어 꿈을 이루세요.

행운의 전령 자세히보기

(*^3(^^*)사랑방/☆---신비·엽기·쇼킹·연예

컴퓨터 그래픽을 사용해 재현한 '예수'의 얼굴

행운의 전령 2006. 5. 16. 23:15

3D로 구현한 예수의 얼굴은?

 

"예수는 키 153㎝ 몸무게 50㎏에 고슬머리"

토리노의 수의 바탕, 알려진 모습과 달라

 

예수의 얼굴은 어떻게 생겼을까.

히스토리 채널이 '토리노의 수의'를 바탕으로 3D 소프트웨어를 통해 구현한 예수의 얼굴.

 

미국의 다큐멘터리 전문채널인 히스토리 채널은 부활절을 맞아 30일(현지시간)

최첨단 3차원 소프트웨어로 예수의 얼굴을 구현한 ‘예수의 진짜 얼굴은’이란 특집방송을 방영했다.

이 프로그램에서는 컴퓨터 그래픽 전문가들이 최첨단 프로그램을 이용해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혀 사망했을 당시 예수의 시신을 감쌌던 것으로 전해진

‘토리노의 수의’를 바탕으로 예수의 실제 얼굴을 구현했다.

물론 토리노 수의에 대한 진위 논란이 있어 진짜 예수상이라고 단정 짓기에는 무리가 있으나

첨단기술을 이용, 최대한 실제 얼굴과 유사한 형태로 재현했다는 의미를 지닌다.

이번 연구에는 2009년 아브라함 링컨의 모습을 재현하기 위해 디지털 애니메이션 등을 사용한

맥베스 스튜디오의 레이 다우닝팀이 참여했다.

하지만 수의에 나왔던 모습과 컴퓨터로 실제 구현한 모습이 달랐는데

이는 평면(2D)에 있던 모습을 3D, 즉 입체로 구현하면서 상의 왜곡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레이는 “수의는 벽에 매달려 있던 것이 아닌 시신을 감쌌던 것”이라며

“얼굴은 (수의에)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왜곡이 있었다”며 이어 “오랫동안 수의가 진본임을 증명하는데

논쟁이 많았는데 1988년 탄소측정 테스트 결과 수의는

1260~1390년의 물건으로 중세에 위조된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수의는 오랫동안의 파손으로 중세에 수선된 것이기 때문에 연대 측정에 있어

왜곡이 있을 수 밖에 없다는 설명이다.

되살아난 예수는 알려진 대로 잘 생긴 모습이 아니었으며 푸른 눈도 갖고 있지 않았다.

작가인 조나단 모리스 신부는 뉴스닷컴 인터뷰에서 “예수의 얼굴을 알고자 하는 역사는

기독교 교리와 역사의 오랜 전통”이라고 말했다.

 

英학자가 복원한 '까무잡잡한 곱슬머리 예수'




2001년 , 리처드 니브 전 맨체스터대 교수가 복원한 전통적 외모와는 확연히 다른

머리카락이 곱슬곱슬하고 피부가 까무잡잡한 예수 얼굴.

 

니브 전 교수는 알렉산더 대왕의 부친 필리포스 2세를 비롯 다수의 유명 인물의 얼굴을

법의학과 고고학 증거물을 사용해 재현한 사람이다.

 

데일리메일, 인디펜던트 등 영국 언론에 따르면 니브 전 교수는

이스라엘 고고학자들이 갈릴리 호수 주변에서 발굴한 예수와 같은 시기에 살았던

셈족(族)의 두개골 3개를 예수 얼굴 복원에 활용했다.

 

‘예수는 동양인인가 서양인인가?’ 이 질문은 ‘유대인이 동양인인가 서양인인가?’라는

질문과 같다. 예수가 유대인이기 때문이다.

원래의 유대인(셈족)은 고대로부터 팔레스타인 지역에 살아왔기 때문에

가나안 사람 특유의 외모 곧 오늘 날 중동계 사람들과 비슷한 외모를 지녔다.

예수 역시 머리가 짧고, 턱수염이 있고,

까무잡잡한 피부의 사람이었다는 게 역사가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영국의 리처드 니브 전 맨체스터대 교수는 이스라엘 고고학자들이

갈릴리호수 주변에서 발굴한 예수와 같은 시기에 살았던 3개의 셈족 두개골에

컴퓨터 단층촬영과 디지털 3D 기법을 활용해 예수 얼굴을 복원했다.

니브 교수가 재현한 예수 얼굴은 담갈색 눈에 수염을 길렀으며

짧은 곱슬머리와 까무잡잡한 피부를 가졌다.

이는 많은 종교적 그림에서 묘사한 긴 갈색 머리를 가진 백인으로서의

예수 모습과는 전혀 다르다.

성경에서 조차 바울이 “남자가 머리를 기르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라고 언급했다.

이로 미루어 당시 유대인(셈족) 남자들은 머리를 짧게 잘랐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4세기 초에 기독교가 로마 제국의 국교로 선포된 이후

가톨릭교회가 앞장서서 예수를 유대적 바탕으로부터 끊어놓으려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가능한 예수의 모습에서 유대인의 흔적을 지워야 했다..

 

원래 성경은 우상을 만들지 말라고 했다. 여기에는 조각은 물론 그림도 포함된다.

"두렵건대 스스로 부패하여 자기를 위하여 아무 형상대로든지 우상을 새겨 만들지 마라.

남자의 형상이라든지, 여자의 형상이라든지, 땅위에 있는 아무 짐승의 형상이라든지,

만들지 마라". 분명하게 "남자의 형상"을 만들지 말라고 말했다.

 

그럼에도 로마가톨릭은 예수를 서양인들에게 친근한 모습으로

신자들에게 각인시킬 필요를 느꼈다. 아니 유혹을 느꼈다.

그래서 교회 화가들에게 예수를 백인으로 그리거나 조각하도록 했다.

처음에는 많은 사람들이 반대했다. 우상숭배라고.

특히 당시 가톨릭의 본부격인 콘스탄티노플의 동방정교회가 반대했다.

그 무렵 로마제국의 수도는 콘스탄티노플이었다. 하지만 로마가톨릭은 물러서지 않았다.

미개한 게르만족을 교화시키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일이라고 우기면서..

게다가 가톨릭은 백인이 유색인종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했다.

그 뒤 교회에 속한 서구 화가들은 예수가 유대인(셈족)인 줄 뻔히 알면서도

셈족의 모습과는 완전 동떨어진 장발의 백인으로 예수를 그리기 시작했다.

예수를 백인으로 그린 이면에는 밝은 색은 선을 의미하고

어두운 색은 악을 상징한다는 발상이 그들의 무의식 속에 잠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셈족(Semites 또는 Semitic)이라는 낱말은 성경의 창세기에 나오는 인물로

노아의 세 아들 중의 장남인 셈(Shem, 히브리어: שם, "이름"을 의미한다,

아랍어: ساميّ)에서 만들어진 말이다. 이 낱말이 언어학과 민족학에서

처음 사용되었을 때 그 용도는 대체로 중동 지역에서 발원한

한 어족(語族)을 가리키기 위한 것이었다.

이 어족을 셈어족, 셈어파, 또는 단순히 셈어(Semitic languages)라고 부른다.

 

기원후 1세기 경의 셈어의 분포

 

셈어에 속한 언어로는 고대와 현대 아카드어(Akkadian), 암하라어(Amharic),

아랍어(Arabic), 아람어(Aramaic), 그으즈어(Ge'ez), 히브리어(Hebrew), 몰타어(Maltese),

페니키아어(Phoenician), 티그레어(Tigre), 티그리냐어(Tigrinya) 등이 있다.

이 언어들을 사용하는 민족들은 서로 다른 민족이지만 지리적으로 그리고

언어적으로 서로 가까이 분포되어 있다.

이러한 점과 더불어 언어 연구는 문화 연구와 긴밀히 연관된다는 점 때문에

셈족이라는 낱말은 이들 민족들에 대해 특정 한 국가 또는 민족이 아닌

더 넓은 범위의 관점에서 이들의 역사, 문화, 종교,

또는 민족적 특성 및 분류를 기술할 때도 사용된다.

셈어는 상위 어족인 아프리카아시아어족에 속하며 이 어족은 셈함어족으로도 불린다.

오늘날 셈족은 아랍어나 히브리어 같은

셈어를 사용하는 종족이라고 대체로 정의할 수 있다.

셈족은 에티오피아 · 이라크 · 이스라엘 · 요르단 · 레바논 · 시리아

· 아라비아반도 · 북아프리카 등지에 살고 있다.

셈족은 알파벳과 유일신 사상을 전 세계에 전파했다.

유대교 · 기독교 · 이슬람교 같은 주요 종교는 셈족에게서 유래했다.

 

토리노 수의, 왜 성의(聖衣)일 수 없나?

 

▲이 '수의'에 관한 가장 중대한 의문은..과연 예수님의 진짜 성 수의였겠냐 이다.

 

성경의 답변: "아니올시다"

 

복잡한 진/위 논란을 벌일 필요도 없이,

토리노 수의는 결코 예수님의 성의일 수가 없다는 게 성경의 확답이다

(요한복음서 20:6,7)! 성경이 말하는 당대의 수의란,

예수님이 "(싸맨 것을) 풀어 주어 걸어 다니게 하오"라고 말하셨던

라자로의 수의(요복 11:43,44)와 똑 같은 싸개천/wrapper 형태였다.

예수님의 것이라고 특별히 시대를 초월하는 딴 모양일 수가 없었다.

 

좀 더 설명하면, 성경이 말하는 예수님의 진짜 수의는,

미이라에 입히던 고대의 미쯔라임(에짚트) 수의처럼 방취/방부/방충용 향품과 몰약 등

막대한 분량의 향품을 넣어 가며 둘둘 말게 돼 있는

길고 좁은 두루말이/리본형 아마포였고, 머리는 따로 작은 두건으로 쌌다.

 

신약 성경엔 '토리노 수의' 형태의 것이 사용됐다거나 추후 보관됐다는 언급이 전혀 없다.

굳이 토리노 수의가 예수님의 것과 비슷이라도 하려면,

주님이 숨지신 뒤 싸맨 수의가 아니라 처형 당시 십자가 아래서

로마 군병이 주사위를 던져 차지한 주님의 통옷 모양과 더 방불하다고 해야 맞다.

 

더욱이 결정적인 단서는, 토리노 수의엔

기본적으로 고대 수의가 반드시 갖춰야 할 향품/몰약 흔적이라곤 전혀 없다는 게

과학실험 결과다!

반면, 아리마테 요셒과 니코데모는 분명히 예수님의 수의를 엄청난 양의 향품을

군데군데 겹겹이 삽입해 가며 말아 쌌을 터이다(참고: 요복 19:39,40).

 

또 토리노 수의엔 선혈이 (현재진행행으로) 흐르는 자국이 있다.

그러나 요셒/니코데모는 주님의 전신을 정성껏 물로 씻어 닦아 냈다.

모든 혈흔을 지웠다는 말이다.

이것만 봐도 토리노 수의는 "나는 틀림 없는 가짜입니다"라고 자증하고 있다.

만들어도 정말 그럴 듯 하게 만들면 모를까, 모조품 제작자들은 성경에 너무 무식했다.

 

스페인 오비에도에 보관된 '수다림'(터번식 두건)이

예수님의 시신의 머리에 씌웠던 것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오비에도 수다림이 토리노 수의와 여러 모로 일치하는 부분이 많다는데..

그렇다면 더더구나 위와 같은 이유에서 수다림도 진품일 수가 없다.

 

 

두라 유로포스의 세례단에 보존된 직접적으로 표현한 가장 오래된 예수의 초상화,

AD 235년의 것으로 추정되며 예수를 턱수염이 있는 것으로 표현하였다.

 

▲성 캐더린 수도원이 소장한 예수의 초상화

 

 

▲독특한 화가 엘 그레코의 예수 초상화

 

워너 샐만(Warner Sallman)의 '예수의 얼굴

 

▲예수의 얼굴을 정형화시키는데 가장 큰 일조를 한

기독교 미술가 워너 샐만(Warner Sallman)의 '예수의 얼굴',

후에 북유럽의 푸른 눈을 가진 금발의 백인으로 그려진

샐만의 예수 초상화는 5억 장 이상 만들어진다.

 



 

▲두라 유로포스 가정 교회 발굴터

 

▲두라 유로포스 교회의 세례 방을 장식한 벽화, 예수님과 물위를 걷는 베드로

 

▲중풍병자를 고치시는 예수님

 

▲우물가의 사마리아 여인

 

시리아에서 발굴된 가장 오래된 최초의 가정교회: 두라 유로포스 교회

 

두라 유로포스(Dura-Europos)교회는 지금까지 발굴된 교회유적 중 가장 오래된 교회입니다.

이 교회는 1920-1930년대 사이에 시리아 국경 지역에서 발굴된

두라 유러포스라고 불리는 유적지에서 발굴되었습니다.

 

두라 유로포스(Dura-Europos)유적지는

고고학적으로 매우 가치가 높은 곳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 이유는 AD 257년에 땅 속에 묻힌 이후

이곳에 어떤 마을도 다시 세워지지 않았기 때문에

당시 도시 모형을 원형 그대로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두라 유로포스는 BC 303년 셀루쿠스(seleucids)왕국 시대에 그리스풍의 계획도시로서

무역로를 연결하는 거점도시로 세워졌고,

AD 165년 이후에는 두로 유로포스는 로마 제국과 사산 페르시아 왕국 사이에

국경을 지키는 로마 제국의 요새 도시로 사용되었습니다.

AD 257년에 마침내 두로 유로포스는 사산 왕국에 포위 공격을 받아 함락되었고,

그 이후 이 도시는 진흙과 먼지 속에 묻혀 버리면서 완전히 사라져버렸다가,

20세기에 참호를 파던 영국군에 의해 우연히 발굴되었습니다.

 

특별히 두라 유로포스에서 발굴된 교회는 지금까지 발굴된 교회 건물로서

가장 이른 시기의 교회 건물로 인정받고 있는데, 이는 단독 건물이 아니고

집을 교회로 사용한 가정교회였습니다.

로마제국이 313년 기독교를 공인하기 전까지 기독교 교회는 핍박을 피하기 위해

가정교회의 형태로만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이 유적지에서 발견된 두로 유로포스 교회는 완전하게 그 형태를 유지한 채 발굴되었는데,

그 이유는 로마 군인들이 도시의 방어를 위해 성벽에 붙어 있는 모든 건물에

흙과 돌을 채워서 성벽을 강화했는데,

바로 이렇게 채워진 흙과 돌이 이 성벽에 붙어있던 교회 건물들의 형태를

완전하게 보존하게 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이 두로 유로포스에서 이 교회뿐만 아니라, 유대인 회당, 그리스 신전,

로마 신전이 함께 발굴됨으로서 다양한 종교와 문화가

공존하고 포용되었던 도시였음이 드러났습니다.

또한 로마 초기의 기독교 역사가

단지 박해의 역사만은 아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고 합니다.

 

두로 유로포스 가정 교회는 예배 장소로 쓰였을 커다란 홀이 있는

가정집 형태를 갖고 있습니다.

세례를 위해 쓰였던 방에 그려진 벽화들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AD 235년의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 그림들의 주제는 선한 목자, 중풍 병자의 치료,

물위를 걷는 예수님과 베드로와 같은 것으로서,

예수님을 그리기 시작한 최초의 기독교 회화입니다.

또한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간 세 여인들, 우물가의 사마리아 여인,

아담과 이브, 그리고 다윗과 골리앗이 그려진 벽화도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