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운의 전령(행운의학)

무지개다리 올라가는 그날까지 행복의 문을 활짝 열어 꿈을 이루세요.

행운의 전령 자세히보기

┌(ㆀ_ _)┐건강/氣.ibody(혈액형~♡)

동의수세보원 - 사상의학의 특징

행운의 전령 2006. 5. 30. 00:39
동의수세보원 - 사상의학의 특징



사상의학은 동무(東武) 이제마(李濟馬, 1837∼1900)가 주장한 학설이다. 인간은 네 가지 체질(태양인, 소양인, 태음인, 소음인)로 구분할 수 있으며 각 체질에 따라 생리, 병리 등이 각각 다르므로 진단, 치료, 양생법도 달리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상의학은 또 인간의 체질을 나누는 데 있어 육체뿐만 아니라 정신까지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에 기존 의학과는 구별되는 심신의학(心身醫學)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사상의학에서 가장 어려운 것 중 하나가 체질감별이다. 일반적으로 체질을 감별하는 방법으로는 신체 부위별 기상을 보는 체형기상론(體型氣像論), 용모에서 나오는 기운을 보는 용모사기론(容貌詞氣論), 체질속성상 잘 유발되는 행동을 보는 성질재간론(性質材幹論), 평상시 마음과 욕심을 보는 항심심욕론(恒心心慾論), 체질별 질병 상태가 다른 것을 보는 체질병증론(體質病證論) 등이 있다. 물론 체질 판단을 할 때는 이런 여러 방법론을 종합하여 내린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제일 중요한 것은 성정(性情)의 차이를 이해하여 판단하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본다면 사상의학은 사람의 마음을 고도로 분석하는 심성학(心性學)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사상의학에서 체질 판단을 할 때 성정을 중요시하는 까닭은 사상의학의 역사적 배경을 살펴보면 이해하기 쉽다. 이는 사상의학이 이웃나라인 중국이나 일본에는 없으면서 유독 우리나라에서만 발달한 이유와 일맥상통한다.

고려 말 우리나라는 전세계 문명국의 대부분을 점령한 원나라 수도 연경(燕京)에 만권당(萬卷堂)을 설치하여 성리학을 본격적으로 수입했다. 인간의 심성을 체계적이며 합리적으로 연구하는 성리학은 우리나라에서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주장하는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에 의해 완벽하게 이해되니, 이때까지를 주자성리학(朱子性理學)이 완성되는 단계로 구분하고 있다.

주자성리학이 정리된 것에 힘입어 이통기국설(理通氣局說)을 주장하는 율곡(栗谷) 이이(李珥, 1536∼1684)에 의해 조선 성리학이 새롭게 전개되니, 이때부터 우리나라 성리학은 중국에는 없는 우리나라만의 독창적인 고유사상으로 발전했다.

이후 심성(心性)이 사단칠정(四端七情)으로 나타나는 것에 대한 해석방법을 둘러싸고 유명한 사단칠정 논쟁 등이 우리나라에서 200여 년 넘게 진행되어 심성학 연구에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단일 주제를 놓고 당대의 대학자들이 200년 넘게 논쟁을 벌인 일은 다른 나라에서는 좀처럼 찾아보기 어렵다.

성리학은 진경시대라는 찬란한 문화의 꽃을 피운 뒤 말폐현상이 나타난 조선 후기에 다소 공리공담으로 흐르기도 했으나, 인간의 마음을 구조적으로 분석 관찰하는 심성학은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이러한 문화적 토대에 힘입어 허준(許浚, 1546∼1615)의 ‘동의보감’ 이후 더욱 축적된 의학지식과 고도로 발달한 심성학이 만나 우리나라가 전세계에 자랑할 만한 것 중 하나인 사상의학을 탄생시킨 것이다.

그러면 같은 동양 문화권인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사상의학이 나오지 않은 까닭을 살펴보기로 하자. 성리학을 처음 연구했던 중국에서는 임진왜란 이후 명나라가 망하고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가 중원을 점령했다. 청나라로서는 의리명분론을 중시하는 성리학을 계속 국시로 삼았다가는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꼴이 될 것이므로, 성리학 대신 실증적인 것을 중시하는 고증학을 국시로 삼아 발전시켰으니 심성학에 대한 연구는 더 기대하기 어렵게 되었다.

이후 서구열강의 침략으로 청나라가 망할 때까지 중국에서는 성리학이 연구되지 않았기에 중국에서 사상의학이 나오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한편 섬나라인 일본은 성리학 논쟁의 양대 산맥인 퇴계철학과 율곡철학 중 자기 입맛에 맞는 퇴계철학만 수입했다. 천재지변이 빈발하고 배를 주로 타는 일본인들은 일사불란한 것을 좋아하는 특징이 있어 더욱이 율곡철학을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어떤 학문이든 서로 논쟁을 거치면서 발전하는 법인데, 일본에서는 그렇지 못했기 때문에 깊이 있는 심성학이 나오기 어려웠고, 따라서 심성학에 뿌리를 둔 사상의학은 생각조차 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가진 사상의학에서는 사단(四端)인 인의예지(仁義禮智)와 칠정(七情)의 핵심인 슬픈 마음(哀心), 노여운 마음(怒心), 홀로 즐기는 마음(喜心), 더불어 즐기는 마음(樂心)의 편차에 따라 체질이 구분된다고 보았다.

따라서 심성에 따라 체질을 구분하는 사상의학은 심성학과 의학이 만난 심신의학으로서 인간 중심의 학문이라 할 수 있다.

의학사적인 관점에서 사상의학이 나오게 된 까닭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조선 고유의 찬란한 문화의 꽃을 피우던 진경시대 이후 우리나라는 도시화, 상업화가 더욱 진행되어 인구의 집중과 이동이 빈번해졌다. 이에 따라 콜레라, 수두, 성홍열, 홍진, 장티푸스, 페스트 등의 전염병이 전국에 유행했다. 순조 21년(1821)에는 수도권 인구의 3할 이상이 죽고, 이제마가 23세 되는 철종 10년(1859)에는 40만명이 죽고, 59세 되는 고종 32년(1895)에는 전체 인구의 5%인 30만명이 죽었다. 하지만 기존 한의학은 이에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했기 때문에 새로운 방법론을 제시할 한의학의 출현이 요구되었다.

사상의학에서는 개인별로 본래 타고난 증상(素症)에 따라 질병 발현이 다를 수 있으며, 치료 방법으로 마음의 욕심(心慾)을 다스리는 것이 질병치료의 전제임을 새롭게 제시했기 때문에 이와 같은 시대적 요구에 부응할 수 있었다.

참고로 사상의학의 뿌리가 성리학이라는 역사적 배경을 이해하지 못하고 또 심성학을 배제한 채 단순히 오링테스트, 완력테스트, 반지사용법, 관상, 사주팔자, 반달(손톱)감별법 등으로만 하는 요즘의 체질 판단법은 간혹 들어맞을 수도 있겠지만, 보편타당한 것이라 하기에는 어렵다.



동무 이제마의 생애


한국 한의학에 새로운 장을 개척한 동무 이제마는 조선 철학사의 한 획을 그은 유학자이며 의성(醫聖)이라 할 수 있다. 동무는 세도정치가 더 심해지던 헌종 3년(1837) 3월19일(음력) 함경도 함흥의 둔지(屯地)에서 이반오(李攀五, 1812∼1849)의 서자로 태어났으며 안원대군(安原大君)의 19대손이 된다. 전주 이씨 족보에는 동무의 이름이 변운(變雲) 또는 변진(變晋)으로 되어 있고, 자호(自號)는 동무, 자는 무평(懋平) 또는 자명(子明)이고, 별호로는 함흥의 반룡산(盤龍山)을 본떠 반룡산노인(盤龍山老人)이라 하였다.

동무공의 탄생에 대해서는 전해오는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동무의 조부인 이충원(李忠源, 1789∼1849)이 하루는 꿈을 꾸었는데, 웬 사람이 제주도에서 가져온 용마(龍馬)라면서 잘생긴 말 한 필을 끌고 와서는 ‘아무도 알아주는 사람이 없어 이 집으로 끌고 왔으니 맡아서 잘 길러달라’고 하면서 집 기둥에 매놓고 가버렸다. 그는 말을 어루만지며 기뻐하다가 잠을 깨었다.

이때 어떤 여인이 강보에 싸인 갓난아이를 안고 들어와 이충원의 아들인 이진사의 소생이라고 했다. 이에 이충원은 큰물을 건너온(濟) 말(馬)이라는 뜻으로 아기 이름을 제마(濟馬)라고 지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인연으로 동무공은 어려서 할아버지의 깊은 사랑을 받고 자랐다. 동무가 비록 서자이기는 했지만 이충원에게는 첫손자이고, 동무의 뒤를 이어 두 손자가 태어나는 경사가 있었기에 더욱 각별한 사랑을 받았다.

동무의 할아버지 이충원은 특별히 관직에 오른 적은 없지만 효행으로 교관(敎官)에 임명되었고 정문(旌門)을 하사받았다. 이충원은 모두 3남2녀를 두었는데 큰아들 이반린(李攀麟)은 종7품 직장(直長)을 지냈고, 둘째 아들 이반구(李攀九)는 종6품 현감(縣監)을 지냈으며, 셋째 아들이자 동무공의 아버지인 이반오(李攀五)는 20세에 사마양시(司馬兩試)에 합격하여 진사 첩지를 받았지만 관직에 나아가지는 못했다.

이와 같이 유학을 공부하는 분위기에서 태어난 동무공은 천품이 쾌활, 용감해서 개성을 굽히지 않았으며 총명했기에 7세부터 큰아버지 이반린에게서 ‘통감절요(通鑑節要)’를 배우기 시작했다. 10세에 문리(文理)가 트여 스스로 공부하기 시작했고, 특히 주역(周易), 제자백가(諸子百家), 병서(兵書) 등을 탐구했다.

또한 그는 글만 아는 서생과 달리 말타기와 활쏘기 등 무예 익히기를 좋아한 문무를 겸비한 이였다. 동무 스스로 자신의 호를 우리나라(東國)의 무인(武人)이라는 뜻으로 동무(東武)라 한 것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동무는 향시(鄕試)에 장원 급제해 자신의 영민함을 뽐냈는데 이때가 헌종 15년(1849)으로 동무의 나이 13세였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아버지 이반오가 이 해 4월 38세로 세상을 떠나자 동무는 슬픔에 잠기게 된다. 슬픔을 이겨내기도 전에 동무를 누구보다 사랑한 할아버지 이충원이 설상가상으로 그 해 12월 61세로 타계한다. 감수성이 예민한 13세의 동무에게는 너무 벅찬 시련이었다.

그러나 동무는 슬픔을 이겨내고 견문을 넓히기 위해 여행을 떠나는데 여기에는 서자 출신이라는 신분 제약도 한몫한다.

전국 각지를 유람하던 동무는 18세에 러시아 지역까지 여행하며 견문을 넓혔는데 이때가 철종 5년(1854)이다. 만주를 유람하던 중에는 많은 서책을 비치하고 일반에 열람시키던 의주(義州) 부호 홍씨 집을 방문해 서책을 탐독하니 이때가 철종 7년(1856)으로 동무의 나이 20세다.

23세가 된 동무는 조선 유학을 대표하는 한 사람으로 서경덕(徐敬德)·이황(李滉)·이이(李珥)·이진상(李震相)·임성주(任聖周)와 함께 성리학의 6대가로 일컬어지는 기정진(奇正鎭, 1798∼1876)을 찾아가 3년간 학문을 배우면서 유학을 더욱 깊이 공부한다.

한편 동무의 사상에 큰 영향을 끼친 운암(芸菴) 한석지(韓錫地, 1709∼1803)의 저서 ‘명선록(明善錄)’을 접하게 된 데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동무가 30세 전후 때 함흥에서 정평으로 가는 길이었다. 날이 저물어 어느 주막에 들어갔는데 흙벽에 붙은 벽지의 글귀가 놀랄 만한 내용이었다. 그래서 주인을 찾아 책의 저자에 대한 얘기를 듣고 손수 필사한 것이 ‘명선록’이라 한다. 동무는 생전에 제자들에게 “운암은 조선의 제일인자”라고 여러 번 말했으며, 선덕면 서호리 도장동에 있는 운암의 묘소를 찾아 제사지냈다고 한다.

동무는 유학을 공부하는 한편 새로운 것에 대한 동경도 계속 느꼈던 듯하다. 고종 8년(1871) 35세에 다시 두만강 유역과 연해주 지방을 여행하면서 새로운 풍물을 보고 공부한다. 동무는 여행하면서 본 화룡선(火龍船, 증기로 움직이는 군함), 전화, 전신주, 대화(大火, 기관총) 등을 보고 자세히 설명하는 ‘유적(遊蹟)’이라는 글을 남긴다.

고종 12년(1875) 새로운 것을 찾아 공부하던 동무는 드디어 무과(武科)에 오르는데, 이때 그의 나이 39세였다. 이듬해 무위별찬군관(武衛別選軍官)으로 무위소(武衛所, 조선 말기에 궁궐 수호를 위해 설치한 관청. 1873년 친정에 임한 고종이 훈련도감에서 500명을 선출, 궁정 수비를 강화하면서 만들었음)에 들어간다.

이때 동무는 이미 의학에 입문한 듯한데 소양인에게 육미지황탕(六味地黃湯)을 투여하는 임상실험을 하고 있었다. 사실 자신의 체질에 대해 스스로 태양인이라고 밝힌 동무는 열격증(음식을 먹으면 넘기기 어렵고 넘어가도 이내 토하며, 입안에 침이나 거품이 고이는 증상)으로 어렸을 때부터 고생하였다. 여러가지 방법으로 치료하였지만 호전이 되지 않자 기존 의학에 회의를 느끼고 스스로 의학을 틈틈이 공부하며 새로운 방법을 모색한 끝에 독창적 의학체계를 갖춰가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 동무는 사상의학의 이론적 배경이라 할 수 있는 ‘격치고’를 44세부터 집필하기 시작해 13년 만인 57세에 완성함으로써 유학에 새로운 장을 펼친다. 고종19년(1882) 46세의 동무는 소음인체질 아들인 용해(龍海), 소양인체질 아들인 용수(龍水)에게 평생 조심해야 할 수양방법을 지어주었다. 이것으로 미루어보면 이 당시 동무는 체질에 따른 양생법을 이미 터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동무는 고종 30년(1893) 7월13일부터 서울 남산 이능화(李能和)의 아버지 집에서 ‘동의수세보원(東醫壽世保元)’을 집필하기 시작해 이듬해 4월 13일에 완성한다. 사람의 체질을 주역 이치에 맞추어 4가지로 구분하는 새로운 체질의학이 탄생한 것이다. 당시 동무는 이능화의 눈병을 광물질인 활석과 석고로 치료하였다고 한다.

그는 62세 때 관직에서 은퇴한 뒤 함흥에서 보원국(保元局)을 경영하면서 환자들을 돌보았다. 그리고 동무가 사망한 후에는 둘째 아들 용수(龍水)가 이어받아 경영했다고 한다. 동무는 사망하기 전 ‘내가 죽은 뒤 100년이 흐르면 사상의학이 온 세상을 풍미할 것’이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중 한 사람인 최린(崔麟, 1878∼1958)은 자서전에서 동무와의 일화도 기록해 두고 있다. 자신의 나이 21세 때 동무에게 치료받은 적이 있는데, 먼저 진맥한 후 수족과 피부를 만져보더니 종이와 붓으로 글을 쓰게 한 다음 장작개비를 옮기게 했다. 그 후에 소음인이라 하여 향부자팔물탕(香附子八物湯)의 처방을 내리고 훈화(訓話)를 해주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