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양군(永陽君) 파
영양군 거(? : 1521∼1561)는 중종대왕의 4남으로 창빈(昌嬪) 안씨 소생이다.
후사가 없어 성종대왕의 12남 무산군(茂山君)의 손자
흥녕군(興寧君) 수전(秀캿 : 1554∼1605)을 계자로 삼았다.
흥녕군은 풍해군(豊海君) 잠(캀 : 1585∼1648)과 풍릉수(豊陵守) 혼(混)을 낳고,
풍해군은 능산군(綾山君) 희(僖 : 1608∼1663), 능봉군(綾峯君) 칭(? : 1610∼1666), 능강수(綾岡守) 찬(? : 1614∼1675), 능평수(綾平守) 신(信 : 1616∼1635), 능안수(綾安守) 의(儀 : 1620∼1682),
능계수(綾溪守) 급(伋 : 1623∼1689), 능주도정(綾洲都正) 간(侃 : 1625∼1690)을 낳았고,
풍릉수는 금원령(錦原令) 탁(倬)과 금성령(錦城令) 척(倜)을 두었다.
이들 9형제의 후손들이 퍼져 오늘의 영양군파를 이루고 있다.
이들 중 흥녕군 · 풍해군 · 능봉군 3대에 얽힌 일화가 유명하다.
임진왜란이 일어나 선조대왕이 의주로 파천하고 광해군은 세자로서 조정을 나누어(分朝),
종묘의 신주를 모시고 갔다. 개성에 이르러 목청전(穆淸殿) 뜰에다 그 신주들을 묻고 갔다.
평안도 평산(平山)에 이르러 흥녕군이 말하기를 “신민(臣民)이 모두 종묘사직에 매어 있는데 사주를 파묻고 가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며 윤두수(尹斗壽 : 1533∼1601)와 더불어 개성으로 달려가 모두 파 가지고 왔다. 그래서 호성공신(扈聖功臣) 3등에 책록되었으나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그리고 그 아들 풍해군도 인조대왕이 이괄의 난으로 공주로 몽진했을 때 호성(扈聖)하고,
병자호란으로 남한산성에 들어갈 때도 호종하여 공훈에 책정되었으나 받지 않았다.
또 풍해군의 차남 능봉군은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 청나라와 화의가 성립되자
자청해서 가짜 왕자로 꾸며 심양에 갔었으나 가짜 대신 심즙(沈? : 1569∼1644)이 탄로시켜 되돌아왔다.
그래서 영국공신(寧國功臣) 2등에 책록되었으나 받지 않았다.
그래서 세상에서 이들 3대를 두고 조자손(祖子孫) 3대가 훈록(勳錄)을 사양했다는 뜻으로
삼세사훈가(三世謝勳家)라 한다.
후손 중에는 문과급제로 영양군 7대손 성수(性遂 : 1718∼1775)는 대사간을 지냈고,
심전(心傳 : 1738∼1799)은 정언(正言)을 지냈는데 이들은 부자지간이다.
또 이조참의를 지낸 중번(重蕃 : 1629∼1688), 음사(蔭仕)로 현령 1명, 참봉 2명이 있다.
또 무과로는 영장(營將)을 지낸 하번(夏蕃 : 1648∼1709)과
방어사(防禦使)를 지낸 형번(亨蕃 : 1650∼1699)이 있다. 그리고 진사는 11명, 생원 1명이 있다.
<선원속보>를 만들 당시의 종손은 조응(祚應)이고,
문장(門長)은 순영(順永)이며 교정유사(校正有司)는 하용(河鎔)이었다.
*
영양군(永陽君) 파
의
항렬자 일람표입니다
시조 로부 터:世 |
선계· 제왕 |
시조:世 | 36 | 37 | 38 | 39 | 40 | 41 | 42 | 43 | 44 | 45 | 46 | 47 | 48 | 49 | 50 |
파조:代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
28 세 | 중종 中宗 |
영양군 (永陽君) |
종수 | 익전 | 영 | 목 | 응 | 재 | 용 | 해 | 주 | 우 | 기 | 의 | 운 | 종 | 희 |
宗遂 | 翼傳 | ○永 | 穆○ | ○應 | 載○ | ○鎔 | 海○ | ○柱 | 愚○ | ○基 | 義○ | ○雲 | 種○ | ○熙 |
'Οо³°`제왕별 파시조 > 중종대왕' 카테고리의 다른 글
중종대왕-해안군(海安君) 파 (0) | 2010.08.15 |
---|---|
중종대왕-금원군(錦原君) 파 (0) | 2010.08.15 |
중종대왕-덕양군(德陽君) 파 (0) | 2010.08.15 |
중종대왕-봉성군(鳳城君) 파 (0) | 2010.08.15 |
중종대왕-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 파 (0) | 2010.08.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