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학대사(無學大師)의 일화
무학은 태조 원년(1392) 10월11일 왕사로
임명되었다. 바로 태조의 생일날이었다. 태조는 무학을 왕사로 임명하면서 묘엄존자(妙嚴尊者)라는 법호를 하사했다.이런 일화가 있다. 무학 대사가 설봉산 아래 토굴에 살고 있었는데 태조가 아직 왕위에 오르기
전이다. 아주 이상한 꿈을 꾸었다.꿈에 1만 마리는 됨직한 닭이 일시에 『꼬끼오』하고 우는가 하면 1천여호나 되는 큰 동네에서 한꺼번에 방아찧는
소리가 쿵하고 요란했다. 더욱 이상한 것은 이성계가 다 쓰러져 가는 집에 들어가서 서까래 세개를 지고 나왔는데 꽃잎이 우수수 떨어지고 거울이
땅에 떨어졌다는 것이다. 이성계는 하도 궁굼해서 토굴에서 수도중인 신승인 무학에게 찾어가서 꿈 이야기를 하고 물어 보았다,무학은 『당신이 찾아올
줄 알았다』고 하면서 해몽을 시작했다. 『그 꿈은 매우 희귀한 꿈입니다. 1만여 집에서 일시에 닭이 울고 1천여집에서 방아 소리가 난 것은 높고
귀하게 된 것을 축하한다는 뜻이고, 헌집에 들어가서 서까래 셋을 지고 나온 것은 임금 왕(王)자를 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꽃이 떨어지면 열매를
맺는다는 뜻이요, 거울이 땅에 떨어지면 소리가 난다는 뜻이니 모두가 왕이 되라고 독촉하는 길몽입니다』
당신은 군왕이 될 상을
가졌습니다. 오늘 이 일을 남에게 말하지 마시오. 목숨이 위태할 것이니 극비에 부치십시요. 큰일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며 반드시
성인(聖人)의 도움을 받아야 될 것이니 이곳에 절을 짓고 이름을 석왕사(釋王寺)라 하고 천일기도를 드리도록 하시오. 그러면 반드시 당신이 왕업을
일으킬 것입니다』이 이야기는 서산대사(西山大師)가 지었다는 설봉산 석왕사기(雪峰山 釋王寺記)에 기록된 것이다. 이후 이성계는 왕명을 어기고
위화도 회군을 단행하고 마침내 왕위에 올랐다. 무학의 예언에 힘을 얻은 것이다. 위화도 회군 때 또 한 사람의 스님이 이성계의 두뇌가 되어
전략을 세워 주었다. 신조(神照)가 그 사람이다. 신조는 이성계 부대의 주축인 승군(僧軍)을 지휘하고 있었다. 그러나 집권한 뒤 이성계의
후손들은 유교세력과 손을 잡고 억불(抑佛)정책을 썼다. 정치의 속성이 비정한 것이라 하지만 그때 불교와 유교를 모두 다독거려주었더라면 조선왕조
역사는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한양을 새 수도로 정하는 데 있어서도 태조 이성계는 무학대사의 의견을 물었다. 이번에는 무학의 대답이 모호했다.
왕이 왕사 무학에게 『이 곳 한양이 어떻습니까?』라고 물으니 왕사는 『이 곳은 사방이 높고 아름다운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중앙이 평탄해서
도성으로 알맞은 곳입니다. 그러하오나 대신들과 지관(地官)들의 의견을 묻고 따르는 것을 잊지 마소서』 라고 대답했다. 이 대화는 「태조실록」에
기록된 것이다. 무학이 말끝을 흐린 데는 이유가 있었다. 무학은 한양 정도(定都) 문제를 놓고 정도전과 날카롭게 대립했었다. 무학은 정도전과
달리 무악산(毋岳山) 밑 지금의 신촌에 궁궐을 지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그러나 정도전은 한사코 무학의 주장에 동조하지 않고 북한산 아래에
남향으로 경복궁을 지어야 한다고 우겼다. 이성계는 당황했다. 자기 눈에도 신촌은 왕도로 적절하지 않았다. 땅이 좁은 것은 고사하고 산이 동쪽에
기울어 있어 궁궐을 서향으로 짓게 되니 그 모양새가 좋지 않았다. 그래서 이성계는 정도전의 주장에 기울게 되었고 무학의 동의를 구했던 것이다.
66세의 무학은 그뒤 연복사에 머물면서 자주 궁안으로 불려가 태조를 뵙게 되었는데 두 사람은 수창궁에서 농담을 주고 받았다 한다. 태조가 먼저
말했다.
『누가 농담을 잘하는지 내기를
해봅시다』
『대왕께서 먼저 하시지요』
내가 보니 스님은 돼지처럼 생겼소』
제가 보니 대왕께서는 부처님 같습니다.』
어째서
스님은 같이 농담을 안 하시오』
아닙니다. 농을 한 것입니다. 용의 눈에는 모두 용으로 보이고 부처님 눈에는 모두 부처님으로 보인다고 말한
것입니다.』두 사람은 손뼉을 치며 파안대소했다.
왕자의 난이 일어나 태종 이방원이 등극하자 태조가 실망하여 함흥으로 떠났다
함흥차사는 너무나 유명한 일화이다. 무학은 태종의 부탁을 받고 함흥에 갔다. 태조는 무학을 보자 진노하면서 말했다. 왕사까지 이러깁니까? 방원의
부탁을 받고 나를 보러 왔지요?』무학은 웃으면서 말했다. 전하께서는 어찌 그다지도 저의 마음을 몰라 주십니까. 빈도(貧道)가 전하를 한두 해
모셨습니까? 전하를 위로하러 머나먼 길을 걸어서 여기에 온 것입니다』태조는 무학의 설득으로 환도하게는 되었지만 마음속에는 아직도 분노가 가시지
않았던 것이다. 태종이 교외에까지 나아가 태조를 맞이하려는데 하륜이 태종에게 『태상왕의 노여움이 아직 가라앉지 않았을 것이오니 만일의 경우에
대비하여 차일과 장막을 받치는 기둥을 굵게 세우도록 하소서』 라고 조언했다. 태종은 그렇게 하라 일렀다. 하륜은 열아름이나 되는 큰 나무를
베어다가 기둥으로 삼았다. 아니나 다를까 곤룡포를 입고 기다리는 아들 태종의 모습을 본 태조는 갑자기 분노가 터져 나와 활(동궁)을 힘껏 당겨
화살(백우전)을 쏘았다. 태종은 급히 기둥뒤로 숨었는데 화살은 탁 소리를 내며 기둥에 꽂혔다. 간발의 차이였다. 그러나 이것을 본 태조는 껄껄
웃으면서 『이는 하늘의 뜻이로다. 네가 바라던 것이 이거지』 하면서 옥새를 내놓았다. 태종은 눈물을 흘리면서 세 번 사양하는 척 하다가 옥새를
물려 받았다고 한다. 이어 성대한 축하연회가 베풀어졌는데 태종이 아버지 태조에게 헌수(獻壽)하게 되었다. 그때 하륜이 다시 태종에게 아뢰기를
『술통 있는 곳에 가서 잔을 잡고 술을 부으시고 아버님에게 잔을 올리실 때 전하께서 친히 올리지 마시고 내시를 시켜 잔을 드리게 하소서』
했다.태종은 하륜의 말대로 내시를 시켜 술잔을 올렸다. 태조가 술잔을 받아 마시고 나서는 웃으면서 옷소매에 감추어 두었던 쇠방망이를 내어
놓으면서 『모두가 하늘이 시킨 것이다』 하였다는 것이다. 태조는 쇠방망이로 아들을 치려 했던 것이다. 태조 이성계를 돕고 다시 태조 방원을 돕는
무학대사. 그는 과연 어떤 인물이었나. 정권교체기에 정도전과 하륜은 처세 잘못으로 각각 태종과 태조에게 화를 입었으나 무학대사는 신중한 처세술
덕에 두 임금에게 모두 사랑을 받고 무사히 일생을 마칠 수 있었다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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