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운의 전령(행운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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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이와 덕이 - 뒤늦은 후회

행운의 전령 2018. 4. 6. 01:23

제목 - 뒤늦은 후회

아티스트 - 현이와 덕이

 

창밖에 내리는

빗물소리에
마음이 외로워~져요
지금 내 곁에는 아~무~도

아무도 없으니까요


거리에 스치는 바람소리에
슬픔이 밀려~와요
눈물이 흐를 것만 같아서
살며시 눈감았지요


계절은 소리없이 가구요
사랑도 떠나갔어요~ ~
외로운 나에겐 아무 것도
남은게 없~구~요
순간에 잊혀져갈사랑이라면
생각하지 않겠어요


이렇게 살아온 나에게도

잘못이 있으니까요

 

(((간주중)))


계절은 소리없이 가구요
사랑도 떠나갔어요~ ~
외로운 나에겐 아무 것도
남은게 없~구~요
순간에 잊혀져갈 사랑이라면
생각하지 않겠어요


이렇게 살아온 나에게도
잘못이 있으니까요

 

이렇게 살아온 나에게도
잘못이 있으니까요

듀엣 중 장덕은 1961년 4월 21일 서울 생으로,

오늘날까지 살아 있었다면 58세가 됩니다.

하지만 스물아홉 살이라는 너무도 젊은 나이에 유명을 달리 하고 말았죠.

 

장덕은 한국 가요계 역사상 최초의 여자 싱어송라이터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열다섯 살 이른 나이였던 1975년에 데뷔를 했죠. '꼬마 인형'이 현이와 덕이의 데뷔곡이었는데,

어릴 적부터 보인 뛰어난 음악 재능은 아버지의 영향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아버지가 당시 서울시립교향악단의 첼리스트였거든요. 어머니는 서양화가였다고 합니다.

 

안양예고에 재학 중이던 고등학교 1학년 때

진미령의 데뷔곡이자 최대 히트곡인 '소녀와 가로등'을 작곡해서 주었고,

이 노래가 1977년 제1회 MBC 국제가요제에 입상합니다.

열일곱 살의 나이에 말이죠.

하지만 천재적 재능에 너무도 민감한 마음도 딸려 있었던 것인지,

그리고 초등학교 2학년이란 어린 나이에 겪은 부모의 이혼은

장덕의 심리 상태와 앞날에 심대한 영향을 미칩니다.

장덕은 아버지가 재혼을 한다고 하자 손목을 그으며 자살 시도를 하는 등

사춘기다운 질풍노도의 시기를 보냅니다.

 

장덕의 오빠인 장현은 1956년 2월 21일에 태어났습니다.

장덕보다 다섯 살이 위이니 늘 붙어 다니며 함께 하는것과 더불어 장덕이 많이 의지했을 만하죠.

 

손목을 긋는 자살 시도를 한 장덕은 어머니가 있는 미국에 보내져 1981년에는 결혼까지 했었는데요.

1983년에 이혼을 하고 맙니다. 이 결혼에서 생긴 아이는 없구요.

그 와중에 테네시 주립대학교 작곡학과에 다니기도 했죠.

향수병을 이기지 못하고 1983년에 결국 귀국한 장덕은 오빠와 함께

현이와 덕이로 재결합하지만 큰 호응을 얻지 못하고 솔로로 나서게 됩니다.

 

이때부터 히트곡이 줄줄이 나오기 시작하죠.

'님 떠난 후'라는 노래로 가요 순위 프로글매 장기 1위를 한 장덕은

'나 너 좋아해 너 나 좋아해' '날 찾지 말아요' '예정된 시간을 위하여'로,

또 당대 인기가수였던 이은하의 '미소를 띄우며 나를 보낸 그 모습처럼'을 작곡하기도 했습니다.

 

장덕이 솔로로 인기를 누리며 최고의 전성기, 리즈시절을

장현이 장덕이 매니지먼트를 담당하며 평안한 세월이 오는가 싶었는데 남매에게 청천벽력이 떨어집니다.

 

달콤했던 시간은 너무도 짧았죠. 1989년에 오빠인 장현이 설암 판정을 받은 것입니다.

혀를 반 정도 잘라내며 살 수 있다고 했는데도 장현은 이를 거부했다고 합니다.

결국 병세는 계속 악화되고 장덕은 이듬해인 1990년 2월 4일에 수면제 과다복용으로 사망에 이르게 됩니다.

그리고 6개월 뒤인 8월 16일에 장현이 투병 끝에 끝내 세상을 떠남으로서 비운의 남매가 되고 맙니다.

부모의 이혼으로 인한 장덕의 방황이 너무 심해서

어머니가 두 사람을 듀오로 데뷔시킨 것이라고 전해지는데요.

그때부터의 불안한 심리적 상태가 장덕을 평생 지배했던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