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운의 전령(행운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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Οо³°`제왕별 파시조/성종대왕

성종대왕-계성군(桂城君) 파

행운의 전령 2010. 8. 15. 18:55

계성군(桂城君) 파

계성군(桂城君) [1478(성종 9)∼1504(연산군 10)]
 
휘는 순(恂), 자는 수견(壽堅). 성종대왕의 2남이며 어머니는 숙의 하씨로 영의정 연(漣)의 딸이다.
배위 안성군부인(安城郡夫人) 원주원씨는 첨정(僉正) 치(퀫)의 딸이다.
계성군은 슬하에 자녀가 없이 26세로 요절하였고

월산대군의 아들 덕풍군(德豊君)의 차남인 계림군 유(瑠)를 계자로 삼아 후손이 퍼져 나갔다.
묘소는 경기도 시흥군 동면 신림리 을좌에 있었는데 1971년 서울시의 도시확장 계획으로

충남 천안시 목천면 송전리 신대동 메일골 신좌로 이장했다.


*계성군파(성종대왕 2남) 약사

계성군은 성종대왕의 2남이며 연산군의 아우이다.

숙의(淑儀) 하씨 소생으로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영특하였으나 26세로 조졸하여

월산대군의 손자 계림군(桂林君) 유(瑠)를 계자로 삼았다.
계림군은 연양군(延陽君) 등 5남을 낳았고 거기에서 손자가 10여 명을 두어 후손들이 퍼져나갔다.
계성군 후손 중에는 남규(南圭 : 1765∼1837) 남익(南翼 : 1771∼1835) 형제가 문과 급제자이다.
그러나 무과 급제자는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아 무림군파,

덕흥대원군파와 더불어 문중의 3대 무관 집안이라 할 수 있다.
무관중에는 영조 때 이인좌의 난을 평정하여

문무공신에 완춘군(完春君)에 봉해진 수량(遂良 : 1673∼1735)과

흥선대원군의 파락호시절에 빰을 때린 일화로 유명한 장렴(章濂 : 1821∼1873) 형조판서,

그의 아버지 포도대장을 지낸 무관이면서 명필인 남식(南軾 : 1803∼1878) 등 제제다사(濟濟多士)하다.

이들 중 수량, 남식 남규의 정보는 다음과 같습니다.

계림군(桂林君) [1502(연산군 8)∼1545(인종 1)]
휘는 유(瑠), 자는 언진(彦珍). 생부는 월산대군의 아들 덕풍군인데 차남이므로 계성군의 양자가 되었다.

계림군은 인품이 출중하고 활쏘기와 말타기를 잘하여 주변의 시선을 끌었다.

17세에 죽산안씨를 부인으로 맞이했으나 자녀가 없어서 연일정씨를 맞아 1남을 둔 뒤

다시 교하노씨를 맞이하여 4남 2녀를 낳음으로써 슬하에 5남 2녀를 두었다.
1545년(인종 1) 을사사화(乙巳士禍)에 연루되어 계림군은 안변 황룡산(黃龍山) 속에 숨었으나

토산현감(兎山縣監) 이감남(李坎男)에게 체포되어 서울로 끌려와 국문당하여

왕위 찬탈의 모함을 뒤집어 쓰고 동년 10월 15일 오전 7시에 효수형을 당했다.

그 때 다섯 아들 중 넷째 정양군(正陽君) 회(誨)가 13세로,

다섯째 은양군(恩陽君) 양(諒)은 2세로 워낙 어려서 죽음을 면하고 위로 세 아들은 모두 죽음을 당했다.
오늘날 이 정양군 후손이 제주도에 많이 살고 있으며, 은양군 후손은 고양시에 다수 거주하고 있다.

수량(遂良) [1673(현종 14)∼1735(영조 11)]
자는 선보(善甫), 시호는 충양(忠襄). 계성군의 6대손이며 회의군 철남(哲男)의 증손이고

통제사 성뢰(聖賚)의 아들이다. 1699년(숙종 25) 무과에 급제하였다.

그 뒤 덕원부사 · 삼화부사 등을 거쳐 각 병사를 역임하였다.
1728년(영조 4) 청주에서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일어나자,

당시 마병별장(馬兵別將)으로 궁성을 지키고 있던 그는

4도 도순무사인 병조판서 오명항(吳命恒)을 따라 출정하였다.

진위현에서 김성옥(金聲玉)의 목을 베고 승리하였다. 안성에 이르자 그에게 회령부사가 제수되었으나,

그가 부임하기를 주저하자 순무사가 상계(上啓)하여 유임하도록 하였다.

다시 청룡산에서 주장 박종원(朴宗元)의 목을 베고 설동린(薛同麟)을 사로잡은 뒤에,

죽산에서 두목인 이인좌를 사로잡는 공을 세웠다. 이에 분무공신(奮武功臣) 3등에 녹훈되어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라 완춘군(完春君)에 봉해졌다.

그 뒤 포도대장 · 평안도 절도사 · 삼도수군통제사 등을 지냈다.
배위는 정경부인 나주나씨로 찬(?)의 딸이다. 묘소는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 소천동 서록 자좌이다.

남익(南翼) [1771(영조 47)∼1835(헌종 1)]
자는 치붕(稚鵬), 호는 금탕(錦?). 일회의 3남이며 남규(南圭)의 아우이다.

1799년(정조 23) 정시 병과에 급제하여 정언(正言) · 사간(司諫)을 지내고 서장관(書將官)을 역임하고, 경성부사(鏡城府使)를 지냈다.
배위는 숙인 예산송씨로 광훈(光勳)의 딸이다.
묘소는 충주 거곡면 목동 해좌이다.

남식(南軾) [1803(순조 3)∼1878(고종 15)]
자는 경첨(景瞻), 호는 남파(南坡) 또는 성곡(星谷). 계성군의 10대손이며

회의군의 7대손이고 부총관 겸회(謙會)의 아들이다.

1824년(순조 24) 무과에 등제하여 선전관에 제수되고 한성판윤과 지의금부사에 이르렀다.

무관집안 출신으로 많은 서적을 수집하여 장서가 수만권이었고, 옛 사람의 그림과 글씨도 많이 수장하였다. 글씨에서 행서는 명나라 말기의 동기창(董其昌)을 배워 일가를 이루었으나,

전서와 예서는 이에 미치지 못하였다고 한다. 특히 금석문(金石文)을 구하는 자가 많았다.

그림은 산수와 절지(折枝)를 잘 그렸다고 한다.

유작으로 비단에 담채로 그린 <산수도>(개인 소장)가 전해오는데, 중국 명대 이후의 남종문인화풍을 보인다.
배위는 평산신씨 부총관 동완군(東完君) 명원(命源)의 딸이다.
묘소는 경기도 남양주시 별내면 성곡 선영하 간좌이다.

남규(南圭) [1765(영조 41)∼1837(헌종 3)]
자는 경현(景玄) 또는 치곡(穉谷), 호는 설산(雪山). 계성군의 10대손이며

적선군 득인(得仁)의 7대손이고 일회(日會)의 장남이다.

1794년(정조 18) 문묘작헌례 문과 병과에 급제, 승지를 지냈다.
배위는 숙부인 풍산홍씨로 낙원(樂元)의 딸과 안동권씨 길(佶)의 딸이다.
묘소는 충북 음성군 감곡면 익금리 선영 남록 을좌이다.

장렴(章濂) [1821(순조 21)∼1873(고종 10)]
자는 제경(霽卿), 부총관 겸회(謙會)의 손자이며, 한성부 판윤 남식(南軾)의 아들이다.

무과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거쳐 1859년(철종 10) 황해도 수군절도사를 지냈다.

대원군의 중용으로 1866년(고종 3) 병인양요 때 진무사(鎭撫使)가 되었고,

1868년에는 병인양요로 한 때 함락되었던 강화부 유수가 되어 혼란한 민심을 수습하였다.

이어 1869년 금위대장이 되어 흥선대원군의 군사관계 자문에 응하였다.

대원군이 불우하였던 시절에 주석에서 만나 “종친의 체면을 손상시킨다.”고 말하여

대원군의 뺨을 때려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았으나 국방에 필요한 재목이라 하여

구원(舊怨)을 잊고 중용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배위는 초계정씨 좌윤(左尹) 택선(宅善)의 딸이다.

묘소는 경기도 남양주시 별내면 성곡 선영내 간좌이다.

계성군(桂城君) 파항렬자 일람표입니다



선계 시조:世 36 37 38 39 40 41 42 43 44 45 46 47 48 49 50
제왕 파조:代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7 세 성종
成宗
계성군
(桂城君)
명회 남노 정렴 병덕 창휘
明會 南老 庭濂 秉德 昌輝 ○薰 ○九 ○雨 ○珩 ○成 起○ 庸○ 宰○ 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