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운의 전령(행운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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Οо³°`제왕별 파시조/선조대왕

선조대왕-경평군(慶平君) 파

행운의 전령 2010. 8. 15. 16:09

경평군(慶平君) 파

경평군(慶平君.1600~1673)은 선조의 11남이다. 어머니는 온빈(溫嬪) 한씨 다. 온빈 한씨는 흥안군(興安君), 경평군(慶平君), 영선군(永宣君), 정화옹주(貞和翁主) 등 3남 1녀를 낳았다.

경평군은 평생 곧은 성품과 근신하는 태도로 살았다.

특히 정국의 대소사에 직접 관여하지 않으면서 왕실의 안위를 위해 노력했다.

시호는 정간공(貞簡公)이다. 묘소는 경기도 양주시 서면 홍복산에 있다. 

경평군은 영양군· 영흥군· 영주군· 영림군 등 4남을 두었다.

이들 아들 대에서부터 자손이 크게 번성하게 되었다.

경평군은 연산군과 인조를 포함하여 5왕조에 걸쳐서 살았다.

이 동안 폐위된 연산군의 포악한 정치여파로 영창대군(永昌大君), 진릉군(晋綾君),

능창군(綾昌君)이 피살된다.

흥안군은 자신의 친형인 흥안군(興安君)과 중형 인성군(仁城君)이 차례로 살해되는

처참한 상황을 목격했다.   흥안군은 정치적인 격변과 함께 밖으로는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살았다.

그러나 그는 부귀공명의 부질없음을 일찍이 깨달았다.

그러면서 스스로 산수를 유람하면서 왕자로서의 신분을 내세우지 않았다.

자신을 낮추어 자적하고 학문 수양에 힘썼던 것이다.

 경평군의 장남 영양군(嶺陽君) 또한 인조· 효종· 숙종의 혼란기에 나라의 어려운 일을 잘 수행했다. 한편 경평군파의 후손 가운데 택수(澤遂)· 양수(養遂)· 회수(會遂)는

정조의 등극을 반대한 홍인한(洪麟漢)의 역모에 연루된다.

결국 1777년(정조 1) 택수는 복주되고, 양수·회수는 추자도와 제주도로 귀양 갔다가

유배지에서 생을 마쳤다.

경평군파 역시 다른 계파와 마찬가지로 종묘사직을 지키는 과정에서

피화(被禍)되는 등 일련의 시련을 겪기도 하였다.

후손 가운데 언형(彦衡)· 언희(彦熙)· 택수· 양수· 회수 등이 과거에 급제했다.

 

경평군(慶平君) 파항렬자 일람표입니다



선계 시조:世 36 37 38 39 40 41 42 43 44 45 46 47 48 49 50
제왕 파조:代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30 세 선조
宣祖
경평군
(慶平君)
택수 후전 석영 준상
澤遂 後傳 錫永 駿相 ○應 載○ ○鎔 海○ ○柱 愚○ ○基 義○ ○雲 種○ ○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