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운의 전령(행운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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Οо³°`´·,全州李氏(´∀`√)/系譜 및 5代祖 諱字

系譜 (계보) 및 5代祖 諱字 (5대조 휘자) 및 약력

행운의 전령 2010. 8. 24. 00:53

[백과사전의 내용]

시조는 신라 때 사공(司空)을 지낸 이한(李翰)이다. 태조 이성계(李成桂)는 시조로부터 22세,

즉 한의 21대손이다. 그러나 성계의 고조부인 목조(穆祖) 안사(安社) 이전의 사적(事蹟)은

전혀 기록에 전해지지 않는다. 안사는 원래 전주 사람이었는데,

그곳 지주(知州:지금의 知事)와 사이가 나빠 강원도 삼척(三陟)으로 옮아갔다가 얼마 뒤

지주가 다시 그곳으로 부임해 오자 가족을 데리고 간도(間島)지방으로 가서

원(元)나라의 다루가치[達魯花赤:地方官]가 되었다.

그의 아들 익조(翼祖) 행리(行里:성계의 증조부),

또 그 아들 도조(度祖) 춘(椿:성계의 조부)도 때때로 두만강 지방의 천호(千戶)로서

원나라에서 벼슬했고, 춘의 아들 환조(桓祖) 자춘(子春)도 원나라의 총관부(摠管府)가 있던

쌍성(雙城:永興)의 천호를 지냈다.

자춘은 공민왕의 북강(北疆) 회수운동에 내응하여 쌍성 함락에 결정적인 공을 세워

이 지방의 만호(萬戶) 겸 병마사(兵馬使)로 임명되었다.

성계는 영흥 태생으로, 22세 때 처음으로 고려에 벼슬했으며,

아버지의 뒤를 이어 동북면의 병마사가 되어 원군(元軍)과 왜구 토벌에 공을 세워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이 되었고, 이 때부터 고려 말 중앙정권의 중추로 등장하였다.

전주이씨의 분파는 122파로서 거의 왕자대군(王子大君:嫡)과

왕자군(王子君:庶)을 파조로 하고 있으며,

시대 구분에 따라 크게 세 갈래로 나누어진다.

즉, 이태조의 고조부인 안사의 상계(上系)에서 갈라진 파,

안사 이후 이태조 이전에 갈라진 파,

이태조의 후손으로 왕자대군과 왕자군을 파조로 하는 파이다.

안사(18世) 이전의 분파로는 시조 한의 14대손인 단신(端信)을 파조로 하는

문하시중공파(門下侍中公派),

15대손 거를 파조로 하는 평장사공파(平章事公派),

17대손 영습(英襲)을 파조로 하는 주부동정공파(主簿同正公派),

안사의 종손 윤경(允卿)을 파조로 하는 대호군공파(大護軍公派),

한의 21대손 귀을(歸乙)을 파조로 하는 문하평리공파(門下評理公派) 등이 있다.

안사 이후 이태조 이전의 분파로는 안사의 아들인 안천(安川)·안원(安原)·

안풍(安豊)·안창(安昌)·안흥(安興)의 5대군파(五大君派), 행리의 아들인 함녕(咸寧)·

함창(咸昌)·함원(咸原)·함천(咸川)·함릉(咸陵)·함양(咸陽)·함성(咸城)의

7대군파(七大君派), 춘의 아들인 완창(完昌)·완원(完原)·완천(完川)·완성(完城)의

4대군파(四大君派), 자춘의 아들이며 태조의 서형제(庶兄弟)인 완풍군파(完豊君派)와

의안대군파(義安大君派) 등 18개의 파가 있다.

태조의 후손 분파(고종 이전까지)는 일반적으로 99파(25大君·74君)로

알려져 있지만 미취졸(未娶卒), 즉 미혼으로 죽었거나 무후(無後),

즉 후사(後嗣)가 없는 대군·군이 20명 정도가 되므로 실제로는 그 수가 줄어든다.

2003년 현재 전주이씨대동종약원(全州李氏大同宗約院)에 등록된 파종회는 모두 86개이다.

조선의 왕권은 전주이씨인 왕족(王親·宗親)을 주축으로 하고

왕대비·왕비·왕세자비의 동성친(同姓親:外戚)과 이성친(異姓親),

그리고 왕녀의 배우자와 그 근친 등 광범위한 혈연관계를 왕권의 일차적인 토대로 하여 발전·

유지되어 왔다. 따라서 왕위를 둘러싸고 벌어진 골육간의 다툼은 조선 500년을 통해 계속되었다.

역사적으로 전주이씨는 방대한 씨족기반 위에서 정치권력 또는 정치세력의 중추를 이루었다.

즉, 상신(相臣:三議政) 22명, 문형(文衡:大提學) 7명을 배출하여 타씨족을 압도했으며,

문과 급제자 873명을 내어 이씨의 문과 급제자 총 3,190명의 27%를 차지하였다.

전주이씨 100여 파 중에서 으뜸가는 명가는 밀성군파(密城君派:琛, 世宗의 아들)로서

6명의 정승과 3대 대제학을 배출했으며, 덕천군파(德泉君派:厚生, 정종의 아들)가

부자 대제학 등 3명의 대제학과 영의정 1명을 내어 밀성군파에 버금간다.

그 다음으로는 3명의 정승을 배출한 광평대군파(廣平大君派:璵, 세종의 다섯째 아들),

정승 2명을 배출한 선성군파(宣城君派:茂生, 정종의 아들),

정승 1명과 많은 문·무관을 배출한 효령대군파(孝寧大君派:補, 태종의 둘째 아들) 등이 뛰어나고,

무림군파(茂林君派:善生, 정종의 아들)와 덕흥대원군파(德興大院君派:線,선조의 生父)는

무관(武官) 집안으로 유명하다.

오늘날 100여 파 가운데 후손이 가장 번창한 파는 효령대군파이고

광평대군파·덕천군파·밀성군파·양녕대군파 등이 뒤를 잇는다.

2000년 인구조사에서 80만 8511가구에 260만 9890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편 본관별 인구조사에서는 김해김씨(412만 5000명)·밀양박씨(303만 1000명)에

이어 3위를 차지하였다.

인구 구성비로는 전체 인구 가운데 5.7%를 차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실록의 기록]

태조(太祖) 강헌 지인계운성문신무대왕(康獻至仁啓運聖文神武大王)의 성은 이씨(李氏)요,

휘(諱)는 단(旦)이요, 자(字)는 군진(君晉)이다. 그 전의 휘(諱)는 이성계(李成桂)요,

호(號)는 송헌(松軒)이다. 전주(全州)의 대성(大姓)이다.

사공(司空) 휘(諱) 이한(李翰)이 신라(新羅)에 벼슬하여

태종왕(太宗王) 의 10대(代) 손자인 군윤(軍尹) 김은의(金殷義)의 딸에게 장가들어

시중(侍中) 휘(諱) 이자연(李自延)을 낳았다. 시중이 복야(僕射) 휘(諱) 이천상(李天祥)을 낳고,

복야가 아간(阿干) 휘(諱) 광희(光禧)를 낳고,

아간이 사도(司徒) 삼중 대광(三重大匡) 휘(諱) 입전(立全)을 낳고,

사도가 휘(諱) 이긍휴(李兢休)를 낳고, 이긍휴가 휘(諱) 염순(廉順)을 낳고,

염순이 휘(諱) 이승삭(李承朔)을 낳고, 이승삭이 휘(諱) 충경(充慶)을 낳고,

충경이 휘(諱) 경영(景英)을 낳고, 경영이 휘(諱) 충민(忠敏)을 낳고,

충민이 휘(諱) 화(華)를 낳고, 화가 휘(諱) 진유(珍有)를 낳고,

진유가 휘(諱) 궁진(宮進)을 낳고, 궁진이 대장군(大將軍) 휘(諱) 용부(勇夫)를 낳고,

대장군이 내시 집주(內侍執奏) 휘(諱) 이인(李隣)을 낳고,

집주가 시중(侍中) 문극겸(文克謙)의 딸에게 장가들어 장군(將軍) 양무(陽茂)를 낳고,

장군이 상장군(上將軍) 이강제(李康濟)의 딸에게 장가들어 휘(諱) 이안사(李安社)를 낳으니,

이 분이 목조(穆祖)이다.

 

[전주 이씨 선대 계보도]

                                  태종(太宗) 무열왕(武烈王) 김춘추(金春秋)                                      

                                                      ↓     

                                                   (10대)

                                                      ↓

                                    군윤(軍尹) 김은의(金殷義)

                                                      ↓

1. 사공(司空) 이한(李翰)──────김씨

                 ↓

2. 시중(侍中) 이자연(李自延)

                 ↓

3. 복야(僕射) 이천상(李天祥)

                 ↓

4. 아간(阿干) 광희(光禧)

                 ↓

5. 사도(司徒) 삼중 대광(三重大匡) 이입전(李立全)

                 ↓

6. 이긍휴(李兢休)

                 ↓

7. 이염순(李廉順)

                 ↓

8. 이승삭(李承朔)

                 ↓

9. 이충경(李充慶)

                 ↓

10. 이경영(李景英)

                 ↓

11. 이충민(李忠敏)

                 ↓

12. 이화(李華)

                 ↓

13. 이진유(李珍有)

                 ↓

14. 이궁진(李宮進)

                 ↓

15. 대장군(大將軍) 이용부(李勇夫)                                         시중(侍中) 문극겸(文克謙)

                         ↓                                                                                ↓

이의방(李義方)-------16. 내시 집주(內侍執奏) 이인(李隣)─────────문씨

                                               ↓

                                               ↓                       상장군(上將軍) 이강제(李康濟)

                                               ↓                                          ↓

                               17. 장군(將軍) 이양무(李陽茂)──────이씨

                                               ↓

                               18.목조(穆祖) 이안사(李安社)

                                               ↓

                               19. 익조(翼祖) 이행리(李行里)

                                               ↓

                               20. 도조(度祖) 이춘(李椿)

                                               ↓

                               21. 환조(桓祖) 이자춘(李子春)

                                               ↓

                               22.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

     本: 全州 李氏

          
* 5代 諱字 (5대조 휘자)

   1代: 태 조 이 성 계
                 李 成 桂

太祖, 1335~1408 


이씨 조선을 창건한 조선의 제 1대 왕이다.
자는 중결,호는 송헌, 본관은 전주, 함경도 영흥 땅에서 출생하였다.
1356년(공민왕 5년)에 고려에서 벼슬을 시작하여

1361년 홍건적(원나라 말기 도둑의 무리)의 침입을 격파하여 큰 공을 세운 것을 시작으로,

원 나라의 나하추가 침입하자 재차 이를 격파하였다.
1388년 요동을 정벌하고자 했을 때 위하도에서 회군하여 최영 장군을 제거하고

권력을 장악한 것은 유명한 일화로 기억될 것이다.
그 후 공양왕 2년에 일대 개혁을 단행하여 당대의 충신 정몽주를 제거한 후

스스로 이씨 조선을 건국하여 새로운 왕조 시대를 열었다.
이 때가 1392년 이었으며 국호를 '조선'이라 하고 개혁후 건국의 이념으로

사대주의.배불숭유,농본주의를 앞세웠다. 다른 것은 고사하고 '배불 숭유'

즉, 불교를 배척하고 유교를 숭상한다는 정책을 앞세웠는데,

1398년(태조 7년) 왕자의 난으로 하야한 후 불가에 귀의하였다.
이렇듯 한 나라의 왕도 당신이 배척한 종교에 다시 의지하려고 하였던 것을 보면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찹잡하기만 하다.
아무튼 태조 이성계의 행적은 여러 곳에 나타나는데, 이성계가 개성에서

한양(현 서울)으로 천도하기 전 계룡산 정상에서 동남쪽으로 뻗어 내린 곳에

명당지로 유명한 성도봉을 찾은적이 있다.
기록에는 무학 대사와 함께 이곳에 들려 산세를 살펴본 내용이 상세히 설명되어 있는데,

이곳이 계룡산의 심장부에 해당하며 정기가 생동하는 곳이다.
연세가 지긋한 제자 분들은 과거에 한 번쯤 기도 해봄직도 한데 암용추 숫용추가 있는 곳이다.
이곳에서 당시 이성계가 백일 기도를 하고 조선 왕에 등극하였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태조 이성계는 1335년에 출생하여, 1392년 57세 되던 해 이씨 조선을 창건하여 왕이 되었고,

64세가 되던 해에 하야하였으며, 1408년 73세를 일기로 세상을 다했다. 

 

가족 관계

부 : 환조 이자춘

모 : 의혜왕후 최씨

원비 : 신의고황후 한씨(神懿高皇后 韓氏) (1337년 ~ 1391년)

  • 후궁 : 후궁 (성씨 미상)
    • 의령옹주 (宜寧翁主), 하가 계천위 이등(啓川尉 李䔲)
  • 후궁 : 화의옹주 김씨 (김해기생 칠점선)(? ~ 1428년)
    • 숙신옹주 (淑愼翁主), 하가 당성위 홍해(唐城尉 洪海)
  • 후궁 : 정경궁주 유씨 
      

   2代: 태 종 이 방 원
                 李 芳 遠

太宗(1367(공민왕 16)~1422(세종 4)

 

조선 제3대왕(재위 1400~ 1418), 자는 유덕(遺德), 휘는 방원(芳遠).

태조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

제2차 왕자의 난이 평정된후, 정종의 양위를 받아 조선 제3대 왕으로 즉위.

 

▶왕권강화정책

태종은 공신들이 개인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사병을 폐지하고, 나라의 군대로 편입시켜

국방력을 강화시켰다.
1404년 도읍을 다시 한양으로 옮겼다. 그리고 전국을 8도로 나눴다. 

의정부를 설치하고,  6부(이부,호부,예부,병부,형부,공부)를 직접 관리함으로써

나라일에 대한 왕의 권한을 크게 늘렸다.

억불승유 정책을 강화하여 전국의 많은 사찰을 폐쇄한 후, 그 사찰에 소속되었던 토지,

노비를 몰수하였으면 비가와 도참 사상을 엄금하여 미신타파에 힘썼다.

이에 유학을 널리 장려하고 과거제도를 정착시키고,

성균관과 5부학당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게 했다.
이 때 호패법을 만들어, 신분질서도 명확히 하고 인적자원를 정확하게 파악하려 하였다.

 

서자를 차별 대우하는 법과 출가한 여자의 재혼을 금하는 삼가 금지법을 제정하였다.

또한, 하륜 등에게 <동국사략>과 <고려사> 등을 편찬케 하였다.

경제적으로 호포를 폐지하여 백성의 부담을 덜어 주었고, 신문고를 설치하였다.
국방정책으로서 10년 여진족의 일파인 모련위(毛憐衛) 파아손(把兒孫)의 무리를 죽였고,

노략질이 심한 야인(野人:여진인)들을 회유하여 변방의 안정에도 힘을 기울였다


가족 관계

 

원경왕후 민씨(元敬王后 閔氏)

  • 양녕대군 제(讓寧大君 褆) - 정부인(正夫人) 광주 김씨(金氏) 수성부부인(隨城府夫人)
  • 효령대군 보(孝寧大君 補) - 정부인(正夫人) 해주 정씨(鄭氏) 예성부부인(藝城府夫人)
  • 충녕대군 도(忠寧大君 裪): 세종대왕(世宗大王) - 비(妃) 소헌왕후(昭憲王后) 청송심씨(沈氏)
  • 성녕대군 종(誠寧大君 褈) - 정부인(正夫人) 창녕 성씨(成氏) 삼한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
  • 정순공주(貞順公主) - 하가(下嫁) 청평군(淸平君) 이백강(李伯剛)
  • 경정공주(慶貞公主) - 하가(下嫁) 평양군(平壤君) 조대림(趙大臨)[2][3]
  • 경안공주(慶安公主) - 하가(下嫁) 길창군(吉昌君) 권규(權跬)
  • 정선공주(貞善公主) - 하가(下嫁) 의산군(宜山君) 남휘(南暉)
  • 효빈 김씨(孝嬪金氏)
    • 경녕군(敬寧君) 비(裶) - 정부인(正夫人) 청풍 김씨(金氏) 청원부부인(淸原府夫人)
  • 명빈 김씨(明嬪金氏)
  • 신빈 신씨(信嬪辛氏)
    • 함녕군(咸寧君) 인(裀) - 정부인(正夫人) 전주 최씨(崔氏) 전주군부인(全州郡夫人)
    • 온녕군(溫寧君) 정(裎) - 정부인(正夫人) 순천 박씨(朴氏) 익산군부인(益山郡夫人)
    • 정신옹주(貞愼翁主) - 하가(下嫁) 영평군(鈴平君) 윤계동(尹季童)
    • 정정옹주(貞靜翁主) - 하가(下嫁) 한원군(漢原君) 조선(趙璿)
    • 숙정옹주(淑貞翁主) - 하가(下嫁) 일성군(日城君) 정효전(鄭孝全)
    • 숙녕옹주(淑寧翁主) - 하가(下嫁) 파성군(坡城君) 윤우(尹愚)
    • 숙경옹주(淑敬翁主) - 하가(下嫁) 파평군(坡平君) 윤암(尹巖)
    • 숙근옹주(淑謹翁主) - 하가(下嫁) 화천군(花川君) 권공(權恭)
  • 선빈 안씨(善嬪安氏)
    • 익녕군(益寧君) 치(袳) - 정부인(正夫人) 운봉 박씨(朴氏)
    • 혜령군(惠寧君) 지(祉) - 정부인(正夫人) 무송 윤씨(尹氏) 낙안군부인(樂安郡夫人)
    • 소숙옹주(昭淑翁主) - 하가(下嫁) 해평군(海平君) 윤연명(尹延命)
    • 경신옹주(敬愼翁主) - 하가(下嫁) 전성위(全城尉) 이완(李梡)
  • 의빈 권씨(懿嬪權氏) : 영수궁(寧壽宮)
    • 정혜옹주(貞惠翁主) - 하가(下嫁) 운성군(雲城君) 박종우(朴從愚)
  • 소빈 노씨(昭嬪盧氏)
    • 숙혜옹주(淑惠翁主) - 하가(下嫁) 성원위(星原尉) 이정녕(李正寧)
  • 숙의 최씨(淑儀崔氏)
    • 희령군(熙寧君) 타(袉) - 정부인(正夫人) 순창 신씨(申氏) 순창군부인(淳昌郡夫人)/계부인(繼夫人) 평산 신씨(申氏) 평산군부인(平山郡夫人)
  • 덕숙옹주 이씨(德淑翁主李氏)
    • 후령군(厚寧君) 간(衦) - 정부인(正夫人) 평산 신씨(申氏) 무안군부인(武安郡夫人)
    • 숙순옹주(淑順翁主) - 하가(下嫁) 파원위(坡原尉) 윤평(尹泙)
  • 정빈 고씨(貞嬪高氏)
    • 근녕군(謹寧君) 농(襛) - 정부인(正夫人) 하양 허씨(許氏) 태안군부인(泰安郡夫人)
  • 순혜옹주 장씨(順惠翁主 張氏)
  • 소신옹주(昭信翁主)
  • 서경옹주(西京翁主)
  • 후궁 김씨(後宮金氏)
    • 숙안옹주(淑安翁主) - 하가(下嫁) 회천위(懷川尉) 황유(黃裕)
  • 숙공궁주 김씨(淑恭宮主 金氏)
  • 혜순궁주 이씨(惠順宮主 李氏)
  • 신순궁주 이씨(愼順宮主 李氏)
  • 서경옹주 금영(西京翁主 金英)


   3代: 세종 이 도
                李 祹

 

 ◎ 世宗(1397(태조 6)~1450(세종 32)

 

조선 제4대 왕(재위 1418~50),휘, 도, 자 원정, 시호, 장헌 태종의 셋째 아들로

원경왕후 민씨 소생.비 는 청천부원군 심온의 딸 소헌왕후,1408년(태종 8)충녕군에 봉군,

13년(태종 13)에 대군이 되고 18년에 왕세자에 책봉,

동년 8월에 22세 나이로 태종의 양위를 받아 즉위하였다.

그리고 세종대왕의 성명은 ‘이도’이며 자는 원정(元正)이고,

시호는 '세종 장헌 영문 예무 인성 명효 대왕이다.

 

세종대왕의 생애

조선 제4대왕으로써 1397년 태종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1408년(태종 8)에 충녕군이 되었으며, 1418년 6월 왕세자가 되었다.

이후 두 달 뒤인 1418년 8월에 왕위에 올랐다.

원래 태종의 첫째 아들인 양녕 대군이 왕세자였으나,

태종은 자신이 어렵게 이룬 왕권과 정치적 안정을 위해 셋째 아들인

충녕 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충녕 대군(나중에 세종이 됨.)의 타고난 성품이 총명하고 학문이 깊어서

나라를 잘 다스릴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왕위에 오른 세종은 아버지(태종)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열심히 나라를 다스려서

정치, 군사, 과학, 문화, 예술 등 모든 분야에 걸쳐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이런 업적 덕분에 세종은 해동의 요순(중국의 위대한 임금)이라고 높이 받들어졌다.

세종은 18남 4녀를 두었는데, 첫째 아들은 세종의 뒤를 이어 왕이 된 문종이고,

둘째 아들은 어린 조카인 단종을 몰아내고 왕이 된 세조이다.

세종은 1450년 세상을 떠났으며, 능호는 영릉으로 경기도 여주군 능서면에 있다.

세종 대왕의 이름은 도이며, 자는 원정, 시호는 장헌이다.

 

세종대왕의 업적

① 한글 창제 : 우리 민족 문화의 가장 위대한 업적은 훈민정음을 만든 것이다.

세종 대왕은 집현전 학자들을 시켜서 읽기 쉽고 배우기 쉬운 훈민정음을 만들으셨다.

② 과학 기술의 발달 : 이천과 장영실에게 측우기를 제작하도록 하였으며

혼천의, 해시계, 물시계 등의 과학 기구도 발명하였다.

또한 활자 기술과 인쇄 기술을 발전시켰다.

③ 음악의 발달 : 박연을 시켜 중국계 음악인 아악을 정리하고 악보(정간보)를 새로 만들어 냈다.

 

-훈민정음창제-

우선 정음청이라는 것을 설치합니다.

여기에서 바로 지금 우리가 쓰고있는 한글이 탄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훈민정음이 이곳에서 간행되니깐요.

물론 이 한글을 만들기 위하여 많은 반대가 있었으나, 결국 훈민정음을 반포한다.

이로서 세계가 인정하는 한글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시계의 발명-

해시계: 해시계를 일구라고 한 것은 이것이 모두 해그림자로 시간을 알 수 있도록 했기 때문이다. 이 일구들은 모양과 기 능에 따라 여러 가지로 나뉘는데 우리 나라 최초의 공중시계인

혜정교와 종묘 남쪽 거리에 설치됐던 앙부일구는 그 모양이

'솔을 받쳐놓은 듯한' 형상을 하고 있다 하여 이 같은 이름이 붙여졌다.

그리고 현주일구와 천평일구는 규모가 작은 일종의 휴대용 시계였고

정남일구는 시계바늘 끝이 항상 '남쪽을 가리킨다'고 해서 붙여진 이릉이다.

장영실 등이 만든 앙부일구는 단순히 해시계를 발명했다는 측면 외에

더 중요한 과학적 사실들이 내포되어 있다. 다른 나라의 해시계가

단순히 시간만을 알 수 있게 해준 데 반해 앙부일구는 바늘의 그림자 끝만 따라가면

시간 과 절기를 동시에 알게 해주는 다기능 시계였다.

또한 앙부일구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반구로 된 해시계였다.

앙부 일구가 반구로 된 점에 착안해서 그 제작 과정을 연구해보면

놀라운 사실 하나가 발견되는데,

그것은 당시 사람들 이 해의 움직임 뿐만 아니라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는 점이다.

물시계: 물시계로는 자격루와 옥루가 있었다.

자동으로 시간을 알리게 하는 자동시보장치가 달린 이 물시계는 일종의 자 명종이다.

1434년 세종의 명을 받아 장영실, 이천,김조 등이 고안한 자격루는 시, 경, 점에 따라서

자동적으로 종, 북, 징을 쳐서 시간을 알리도록 되어 있었다.

그리고 1437년에는 장영실이 독자적으로 천상시계인 옥루를 발명 해

경복궁 천추전 서쪽에 흠경각을 지어 설치했다.

옥루는 중국 송, 원 시대의 모든 자동시계와,

중국에 전해진 아 라비아 물시계에 관한 문헌들을 철저히 연구한 끝에

고안한 독창적인 것으로서 당시의 중국이나 아라비아의 것보다도 뛰어났다는 평가를 얻고 있다.

측우기: 측우기는 1441년에 발명되어 조선시대의 관상감과 각 도의 감영 등에서

강우량 측정용으로 쓰인 관측장비로, 현대적인 강우량 계측기 에 해당된다.

이는 갈릴레오의 온도계 발명이나, 토리첼리의 수은기압계 발명보다

200년이나 앞선 세계 최초의 기 상 관측 장비였다.

측우기의 발명으로 조선은 새로운 강우량 측정 제도를 마련할 수 있었고,

이를 농업에 응용하게 되어 농업 기상학에서 괄목할 만한 진전을 이룩하였다.

이 측우기의 발명으로 정확한 강우량을 파악할 수 있게 되어 홍수 예방에도 도움이 되었다.

 

가족 관계

 

태종 이방원(李芳遠)과 원경왕후 민씨의 셋째아들

4대 세종(부인:6명 자녀:18남 4녀)

형제 : 양녕대군 이제(李題)

         효령대군 이보(李補)

         성녕대군 이종(李種)

 

배우자 :  청송인 심온의 딸 소헌왕후 심씨

 

자 : 문종대왕 이향(李珦)

      세조대왕 이유(李諭)

      안평대군 이용(李鎔)

      임영대군 이구(李玖)

      광평대군 이여(李璵)

      금성대군 이유(李瑜)

      평원대군 이임(李林)

      영응대군 이염(李琰)

 

소헌왕후 심씨:5대 문종,7대 세조,안평대군,임영대군,광평대군,

금성대군,평원대군,영응대군 등 8남,

정소공주,정의공주 등 2녀

영빈 강씨:화의군 등 1남

신빈 김씨:게양군,의창군,밀성군,익현군,영해군,담양군 등 6남

혜빈 양씨:한남군,수춘군,영풍군 등 3남

숙원 이씨:정안옹주 등 1녀

상침 송씨:정현옹주 등 1녀

 

   4代: 문 종 이 향
                 李 珦

문종(文宗)  1414~1452

 

조선의 제5대 왕(재위 1450~1452), 이름은 향(珦), 자는 휘지(輝之), 시호는 공순(恭順),

세종의 맏아들 어머니는 소헌왕후(昭憲王后) 심씨(沈氏)이고  

비(妃)는 권 전(權 專)의 맏딸로서 현덕왕후(顯德王后),

1421년(세종3)에 세자로 책봉 되었는데 학문을 좋아 했으며 인품이 관후(管厚)하였다

20년간 세자로 있으면서 문무(文武)의 관리를 고르게 등용하도록 했으며

언로(言路)를 자유롭게 열어주어 민정파악에 힘쓰는등 부왕(父王)을 보필한 공이컸다

45년(세종27)세종이 병들자 그를 대신하여 국사를 처리 하였으며

50년(세종32)세종의 뒤를 이어 즉위 하였다 

그해에 (동국병감(東國兵鑑)이 출간 되었고 51년(문종1)에 (고려사(高麗史)

139권이 간행되었으며 52년(문종2)에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가 완성되었다

한편 문종은 병제(兵制)를 정비하여  삼군(三軍)에 속한 12사를 5사로 줄이는 반면

병력을 증대시키고 각 병종(兵種)을 5사에 배분하게 하였다 유학(儒學)은 물론.

천문. 역법(曆法)산술 등에도 조예가 깊었으나 몸이 약했기 때문에 재위3년 만에 병사 하였다

능은 경기도 양주의 현릉(顯陵)이다

 

가족 관계

 

5대 문종(부인:3명 자녀:1남 2녀)

현덕왕후 권씨:6대 단종 등 1남,경혜공주 등 1녀

귀인 홍씨(자식 없음)

사측 양씨:경숙옹주 등 1녀

 
    5代: 단 종 이 홍 위
                 李 弘 暐

단종(端宗)  1441~1457

 

조선 제6대 왕(재위1452~1455), 이름은 홍위(弘暐),

제5대 왕인 문종(文宗)의 아들 어머니는 현덕왕후(顯德王后) 권씨(權氏)

비(妃)는 판돈령부사(判敦寧府事) 송현수(宋玹壽)의 딸인 정순왕후(定順王后),

1448년(세종30)에 왕세손(王世孫)에 책봉되었고 50년에 문종이 즉위하자

세자에 책봉되었다 52년 문종의 뒤를 이어 왕위(王位)에 올랐는데

53년에 그를 보필하던 황보인.김종서 등이 숙부인 수양대군(首陽大君)에 의해 제거 당하자

수양대군이 군국(軍國)의 모든 권리를 장악 하였으며 단종은 단지 이름뿐인 왕이 되었다  

55년 단종을 보필하는 중신(重臣)을 제거하는데 앞장섰던 한명회(韓明澮).

권 남(權 남)등에게 강요되어 단종은 수양대군 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上王)이 되었다

56년에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河緯地). 이 개(李 塏). 유응부(兪應孚).

유성원(柳誠源)등이 단종의 복위(復位)를 도모하다가 발각되어 모두 처형되었으며

단종의 억울한 죽음과 강봉(降封)은 200여 년후인 1681년(숙종7)에 신원(伸寃)되었으며

대군(大君)에 추봉(追封)되었다 98년(숙종24)에는 임금으로 복위되어

묘호를 단종이라 하였다 능은 강원도 영월의 장릉(莊陵)이다

 

가족 관계

 

6대 단종(부인:1명)

정순왕후 송씨(자식 없음)